시미즈 지로초(본명: 야마모토 조고로)란?
저희 시미즈 사람들에게 시미즈의 지로초 두목은 대단한 영웅인 동시에 난폭한 사람이기도 해서, 친근하면서도 어딘가 조금 무서운 이미지가 있는 매우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TV와 영화, 연극에서 그려지는 지로초와 그 동료들의 인상이 강하다 보니, 실제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점이 무척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지로초의 일생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유년기】
시미즈 지로초는 1820년(분세이 3년) 1월 1일, 지금의 시즈오카시 시미즈구에서 배를 가진 뱃사공 다카기 산에몬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외삼촌으로 쌀 도매상 고다야의 주인인 야마모토 지로하치에게 친자식이 없었던 까닭에 지로하치의 양자가 됩니다.
지로하치의 집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주변 사람들이 ‘지로하치네 조고로’라는 뜻으로 ‘지로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소년기】
1829년(분세이 12년) 10세 때, 거친 성격을 감당하지 못해 유이 구라사와에 사는 큰아버지 효키치에게 맡겨집니다.
1834년(덴포 5년) 15세 때 지로하치의 양가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백 냥을 가지고 달아나 버립니다.
이 무렵부터 도박의 재능이 있었던 것인지, 가지고 달아난 백 냥을 밑천으로 쌀 시세에서 큰돈을 벌어 시미즈로 돌아와 집안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1835년(덴포 6년)에는 양부 지로하치가 세상을 떠나고, 지로초는 아내를 맞아 가업에 종사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싸움과 도박을 되풀이하는 나날을 보내며, 여전히 난폭한 사람이었습니다.
【청년기】(임협의 길로)
어릴 때부터 난폭한 사람이었지만, 임협의 길로 들어선 데에는 사실 이유가 있었습니다.
1839년(덴포 10년) 20세 때, 떠돌이 승려에게 “남은 목숨은 5년, 25세가 수명이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때 “어차피 죽을 거라면 짧고 굵게 살겠다”며 임협의 길을 뜻하게 됩니다.
1842년(덴포 13년), 에지리에서 연극을 보고 돌아오던 길에 술에 취해 있던 지로초는 기습을 당해 생사를 넘나드는 중상을 입습니다.
이 기습을 계기로 평생 금주를 맹세합니다.
1842년(덴포 13년), 도박판에서 속임수를 발견한 지로초는 싸움 끝에 사람을 베고 상대를 도모에강에 던져 버립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내와 헤어지고 가업인 고다야를 누나 부부에게 넘긴 뒤, 에지리의 오쿠마 등 부하들과 함께 떠돌이가 되어 시미즈를 떠납니다.
그리고 미카와 땅에서 기라의 부이치에게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웁니다.
여러 지방을 돌며 수련하고 교분을 넓힌 지로초는 시미즈로 돌아와 시미즈 미나토에 일가를 꾸립니다.
1845년(고카 2년), 큰아버지인 와다지마의 다자에몬과 가이국 가모가리 쓰무기무라(현 야마나시현 니시야쓰시로군 이치카와미사토정)의 쓰무기의 분키치 사이에 스루가의 이하라강에서 패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다만 이 싸움은 산바마사의 계략이었다고 하며, 지로초는 이를 중재·조정하여 수습합니다.
이 중재로 지로초는 협객으로서 이름을 높여 이름난 협객의 반열에 오르고, 쓰무기의 분키치는 이를 인연으로 지로초와 관계를 깊게 합니다.
1847년(고카 4년), 28세에 에지리의 오쿠마의 여동생 오초(초대)를 아내로 맞아 시미즈 나카초의 묘케이지 근처에 살림을 차립니다.
1858년(안세이 5년) 12월, 39세 때 고슈의 유텐과 에지리의 오쿠마 사이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지로초와 에지리의 오쿠마는 유텐의 두목인 고후의 은거 노인을 벱니다.
이 일로 관리에게 쫓기게 된 지로초는 오초, 부하들과 함께 세토의 오카이치 집에 몸을 숨깁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오초가 병으로 쓰러져, 나고야의 조베 집으로 옮긴 뒤 끝내 세상을 떠납니다.
1859년(안세이 6년), 예전에 지로초가 친자식처럼 돌봐 주었던 구로쿠가 배신하여, 지로초 일행이 조베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고 포리에게 밀고합니다.
구로쿠의 밀고로 포리가 조베의 집을 덮치고, 지로초는 가까스로 달아나지만 조베는 붙잡혀 그 뒤 옥사하고 맙니다.
지로초는 곧바로 부하 오마사와 모리노 이시마쓰를 데리고 곤피라 참배를 한 뒤, 오와리 지타 가메자키 오토가와에서 구로쿠를 베어 조베의 원한을 풀어 줍니다.
1860년(만엔 원년), 구로쿠를 처단한 소원 성취의 감사 참배를 위해 모리노 이시마쓰를 곤피라 신사에 대신 참배하러 보냅니다.
곤피라 참배 후 미우케야마의 가마타로를 찾아간 이시마쓰는, 오초의 장례 때 지로초에게 전하지 못했던 부의금을 가마타로에게서 맡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이시마쓰는 품에 넣은 부의금을 노린 미야코다(현 하마마쓰시 기타구 미야코다)의 기치베·우메키치 형제에게 속아 참살당하고 맙니다.
1861년(분큐 원년), 바이인 선사 주지가 대접한 복어에 중독되어 가쿠타로와 기사부로가 사망합니다.
이시마쓰의 복수를 궁리하던 지로초는 이 사건을 이용해, 시미즈 일가 전원이 복어에 중독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립니다.
시미즈로 세력을 넓히려던 미야코다의 기치베는 이 소문을 듣고 기회다 싶어 부하 9명을 이끌고 시미즈로 몰려옵니다.
지로초의 계책에 보기 좋게 걸려든 것입니다.
기치베가 시미즈에 올 것을 예상하고 있던 지로초는 기치베의 시미즈 진입 정보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누구보다 먼저 그 정보를 입수합니다.
그리고 오마사, 고마사, 스모쓰네, 세이키치 등과 함께 주점 ‘가고야’에서 미야코다 일가를 기습하여 이시마쓰의 원수를 갚습니다.
또 이해 10월에는 도카이도 기쿠가와 역참에서 열린 시모다의 긴페이와의 화해 자리에 구로코마노 가쓰조가 참석하여 지로초와 대면합니다.
1862년(분큐 2년) 무렵, 고슈의 구로코마노 가쓰조가 세력을 넓혀 옵니다.
두목이던 다케이 야스고로가 옥사한 뒤, 가쓰조는 야스고로의 부하들을 구로코마 일가로 묶어 가미쿠로코마촌 도쿠라를 거점으로 삼고, 고슈 도박꾼의 큰 두목으로서 간토 일대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는 시미즈 근처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
시미즈항은 후지강 수운을 통해 시나노·가이 방면의 연공미를 에도로 실어 나르는 일을 맡고 있어, 이른바 특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후지강 수운의 이권을 둘러싸고, 가쓰조 등 고슈 도박꾼들은 시미즈 지로초의 세력권인 오키쓰 역참과 스루가 이와부치 나루터를 습격합니다.
이때 시미즈 일가 28인방 중 한 사람인 오키쓰의 모리노스케도 습격을 당했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가쓰조는 포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엔슈로 달아납니다.
나카이즈미 관소는 엔슈로 달아난 가쓰조를 붙잡기 위해 오와다의 도모조에게 의뢰했고, 지로초도 가세하여 가쓰조를 고슈로 몰아냅니다.
1864년(겐지 원년) 45세 때, 시미즈 습격을 위한 자금 모금을 강요당한 가쓰누마의 산조가 지로초에게 도움을 청해 옵니다.
1866년(게이오 2년), 47세. 유명한 이세 고진야마 싸움(혈투)이 이해에 벌어집니다.
고진야마 일대는 가메야마·간베 번의 영지와 막부 직할령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어, 다른 영지로 넘어가면 경찰력도 미치지 않는 무법지대나 다름없었습니다.
4월 간논지 잿날에는 절 뒤편에 도박장이 많이 섰기 때문에, 이곳을 구역으로 삼은 두목에게는 막대한 수입이 있었습니다.
간베의 조키치가 이 일대를 구역으로 삼고 있었으나, 조키치가 다른 지방에 나가 있는 사이 구와나의 아노토쿠의 손에 넘어갑니다.
이 간베의 조키치와 구와나의 아노토쿠의 다툼이 발단이었습니다.
지로초 일가가 돌봐 준 조키치의 구역을 빼앗겼다는 소식에, 지로초 밑에서 지낸 뒤 의형제의 잔을 나눌 만큼 가까워진 기라(현 아이치현 니시오시 기라정)의 니키치도 움직입니다.
4월 8일, 아노토쿠의 부하와 오캇피키(관의 앞잡이) 등의 중재를 거절하고, 시미즈 지로초 일가 22명과 기라의 니키치가 간베의 조키치에게 가세하여 고진야마 싸움에 뛰어듭니다.
조키치 측은 지금의 가사도 신사 부근에 진을 치고, 아노토쿠 측은 고진야마 서쪽의 다카쓰카야마에 자리를 잡아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조키치 측이 간베의 조키치, 기라의 니키치, 시미즈 지로초 일가 22명으로 맞선 데 비해, 아노토쿠 측은 아노토쿠 일가에 지로초와 적대하던 구로코마노 가쓰조 일가가 가세하여 130여 명으로 맞섭니다.
수에서 앞선 아노토쿠 측이었지만 오합지졸이었던 탓에, 호위 무사인 가쿠이 몬노스케와 오타 사헤이지가 쓰러지자 전열이 무너져 1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패주합니다.
소수로 승리를 거둔 조키치 측이었지만, 이 싸움에 가세했던 지로초 일가의 호인의 다이고로와 기라의 니키치는 총에 맞은 뒤 칼에 베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소중한 부하를 잃은 지로초는 크게 격노하여 다시 480명을 동원하고, 긴 창 170자루, 총 40정, 쌀 90가마를 배에 싣고 아노토쿠에게로 향합니다.
이에 아노토쿠 측은 두려워 떨며 오로지 사죄하고 화해를 청했습니다.
지로초는 이를 용서하고 화해를 받아들입니다.
이 일 이후 ‘시미즈 지로초’의 이름은 전국에 알려지고 그 위세도 더해 갑니다.
또 그 뒤 기라의 니키치의 1주기에, 지로초는 유족과 함께 묘를 세웁니다.
【전환기】
1868년(게이오 4년) 3월, 슨푸번이 성립합니다. 이에 따라 슨푸 마치부교가 폐지되고, 도정대총독부가 슨푸 마치 사하이야쿠로 임명한 후시야 조스이로부터 지로초는 가도 경호역(경찰서장)에 임명됩니다.
지로초는 자기 같은 사람이 관리가 되다니 당치도 않다며 이 역할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후시야 조스이는 물러서지 않고, 이 역할을 맡으면 지금까지의 죄를 면해 주겠다고 협상합니다.
지로초도 물러서지 않고, 그렇게 해서 맡으면 죄를 피하려고 관리가 되었다며 평생 비웃음을 살 것이라며 또다시 거절합니다.
마침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로 바뀌는 시기의 일본이었기에, 조스이는 “지금은 도쿠가와도 사쓰마·조슈도 없이 모두가 천자님을 맞아 새 시대를 열어야 할 때다. 자신을 버리고 천자님을 위해 힘쓸 생각은 없는가. 시미즈 항구를 지키고 슨푸와 도카이도의 치안을 지키는 것이 곧 천자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다.”라고 말을 건넵니다.
그 조스이의 열의에 감복한 지로초는, 다시 태어나는 전기가 된 그 말을 영혼 깊이 새깁니다.
그리고 가도 경호역을 맡아, 같은 해 7월까지 슨푸와 도카이도의 치안에 힘씁니다.
그때까지 협객으로 이름을 떨치며 살아온 지로초는 이때부터 삶의 방식을 180도 바꾸어 갑니다.
같은 해, 구로코마노 가쓰조는 가명을 쓰고 관군의 선봉으로 슨푸에 들어오려 합니다.
지로초는 이를 곧바로 간파하여 가쓰조가 에지리를 지나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같은 해 7월, 하마마쓰번으로 돌아가는 후시야 조스이를 부하들과 함께 배웅합니다.
또한 에도에서 건너온 수많은 난민, 곧 도쿠가와 가문의 옛 막부 신하와 그 가족들이 시미즈항에 상륙합니다.
지금처럼 공동주택이나 숙박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던 시대였기에, 슨푸 거리는 수많은 난민으로 혼란에 빠집니다.
지로초는 밥을 지어 나누어 주는 등 그들을 구호하고, 곧바로 여기저기 손을 써서 거처를 마련해 혼란을 수습했습니다.
같은 해 8월, 도쿠가와 이에사토 공이 슨푸성에 들어오고, 가쓰 가이슈와 야마오카 뎃슈가 슨푸번의 간사역이 됩니다. 또 이때 에도는 도쿄가 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은 슨푸의 호다이인에서 근신하게 됩니다.
8월 중순 무렵, 옛 막부군 해군 부총재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군함 7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이끌고, 에도에서 슨푸로 가기를 거부한 무사들과 함께 시나가와 앞바다에서 홋카이도 방면으로 탈주합니다.
그러나 도중에 큰 폭풍을 만나 거친 바다를 떠돌게 됩니다.
그중 한 척인 간린마루는 돛대가 부러져 수리를 위해 시미즈항에 들어옵니다.
1868년(메이지 원년) 9월 18일, 시미즈 거리에 갑자기 대포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집을 뛰쳐나온 지로초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옛 막부군으로 탈주한 간린마루를 발견한 관군이, 백기를 내걸었는데도 가차 없이 배 안으로 잇달아 칼을 휘둘러 모두를 죽이고 시신을 바다에 던져 넣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적군인 간린마루 승조원의 시신에 손대지 말라, 묻지 말라, 이를 어긴 자는 반역자로 엄벌에 처한다’는 내용의 고찰(방)이 세워졌습니다.
이 포고와 삼엄한 감시 때문에 바다를 떠도는 시신을 아무도 묻어 주지 못해, 지독한 시취와 참담한 광경이 이어졌습니다.
이래서는 고기잡이도 할 수 없다며, 어부들은 지로초 일가에 어떻게든 해 달라고 상의합니다.
처음에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 애쓰고 있는 두목에게 그런 금지된 일을 시킬 수 없다며 부하들이 말렸지만, 지로초는 움직입니다.
“비록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곳에서 부처가 되었다면 적군도 관군도 상관없다. 그 땅의 사람이 공양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라며, 결국 관에 거스르는 형태로 감시가 없는 한밤중에 부하들을 움직여 시신을 거두고 공양합니다.
그러나 9월 말 무렵, 곧바로 슨푸번 관청에서 출두 명령이 내려옵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지로초 말고는 없다는 소문이 돌아 발각되고 만 것입니다.
자신을 불러낸 마쓰오카 요로즈에게 지로초는 거짓말을 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자신이 한 일임을 인정한 뒤 사람의 도리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지로초의 주장을 끝까지 들은 마쓰오카는, 그 자신도 한때 막부의 신하였던 만큼 깊이 감동하여 죄를 묻지 않기로 했습니다.
1869년(메이지 2년) 50세 때, 지로초가 미카와에 가 있는 사이 2대 오초가 구노 신반구미의 고구레 한지로에게 베여 목숨을 잃습니다.
부하 다나카 게이지로가 곧바로 뒤쫓아 그를 처단합니다.
또 이 무렵, 시즈오카번 대참사 자리에 있던 옛 막부 신하 야마오카 뎃슈는 간린마루 사건에서의 지로초의 행동과 말을 전해 듣고 깊이 감사하여 친분을 맺게 됩니다.
뎃슈는 지로초가 만든 묘에 ‘장사(壯士)의 묘’라는 비명을 지어 줍니다.
이해, 옛 막부 신하 스기 고지(훗날 초대 통계국 장관)가 지로초를 만나, 미호의 염전 개발과 우도산 개간 등 이주해 온 무사들이 살아갈 길을 모색합니다.
같은 해 12월, 신몬 다쓰고로가 지로초를 만나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의 경호를 부탁합니다.
또 이해에 산슈 니시오번 무사의 딸인 3대 오초를 아내로 맞습니다.
【사회사업가로서의 시기】 <후지시 오부치 개간>
1874년(메이지 7년) 55세 때, 당시 시즈오카현령 오사코 사다키요의 권유로 조성금 2,000엔을 받아 무코지마의 죄수들을 모아 후지산 기슭(오부치)의 개간을 시작합니다.
이 땅은 물도 나지 않는 황무지여서 개간은 매우 힘들었지만, 메이지 14년(1881년, 지로초 62세) 야마오카 뎃슈의 소개로 지로초의 양자가 된 아마다 고로가 지휘를 맡아 76정보(町歩)의 개간에 성공합니다.
개간된 이 땅은 ‘지로초’라 이름 붙여져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양자가 된 아마다 고로는 『도카이도 유쿄덴: 일명 지로초 이야기』를 집필하여 1884년(메이지 17년) 도쿄 요론샤에서 출판합니다.
또 이해, 한다항에서 시미즈항으로 진출한 나카노·모리타 합작의 대형 주류 판매점 ‘나카이즈미 현금점’의 개업에도 지로초가 힘을 보탰습니다.
<시미즈항의 발전>
1875년(메이지 8년) 무렵, 원래 시미즈 항구는 도모에강의 하구 항구였습니다.
에도에서 메이지로 바뀌며 새 시대의 개막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린 지로초는, 시미즈항의 발전을 위해서는 차 판로의 확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더 큰 증기선이 입항해 대규모로 무역할 수 있어야 한다며 해운 도매상 경영자들을 설득하고 다녔습니다.
스스로도 1880년(메이지 13년, 61세)에는 ‘세이류샤’ 설립에 참여하여, 증기선 3척을 거느리고 요코하마와 시미즈를 여러 차례 오갑니다.
나아가 수출 차 상인, 시즈오카의 차 상인, 시미즈항의 해운 도매상을 연결하여 시미즈항과 요코하마항을 잇는 정기 항로를 탄생시킵니다.
이러한 지로초의 활동에 힘입어 시미즈항은 바깥 세계에 열린 항구가 되었고, 시즈오카 차는 미국으로도 수출되어 시미즈항은 일본 제일의 차 수출항이 됩니다.
세이류샤 설립 이듬해(1881년), ‘오마사’로 불린 야마모토 마사고로가 세상을 떠납니다.
<영어 학원 개설>
1876년(메이지 9년, 57세), 옛 막부 신하 아라이 간이 연 사숙 ‘메이토쿠칸’의 방 한 칸을 빌려 영어 학원을 엽니다.
차의 해외 수출 일도 있어 영어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낀 지로초는 “앞으로의 젊은이는 영어를 알아야 한다!”
라며 이웃 젊은이들을 모으고, 시즈오카 학문소의 젊은 강사를 초빙하여 영어 학원을 시작합니다.
영어 학원 학생 중 한 사람인 미호의 가와구치 겐키치는 어느 날 요코하마에서 화물선에 숨어들어 하와이로 밀항합니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크게 성공하여, 고향에서는 ‘하와이 씨’라는 애칭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영어 학원은 국제화에 톡톡히 한몫을 했습니다.
이 영어 학원의 모습을 재현한 전시가, 지로초가 만년에 운영한 선숙을 재현한 시설 ‘스에히로’에 있습니다.
<선숙 ‘스에히로’ 개업>
스에히로 개업 전인 65세 때에는 도박꾼 일제 단속으로 시즈오카 이노미야 감옥에 수감되어 징역 7년, 벌금 400엔의 형을 받지만, 세키구치 다카요시 등의 노력으로 이듬해 석방됩니다.
1886년(메이지 19년), 이때 67세였지만 지로초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커진 시미즈항에는 군함도 드나들어 많은 장병이 오갔습니다.
그래서 선숙 ‘스에히로’를 연 것입니다.
시미즈항을 드나든 장병 가운데에는 훗날 ‘군신’으로 불리며 러일전쟁에서 활약한 히로세 다케오도 있었습니다.
히로세가 시미즈항에 들어왔을 때, 50명 정도의 해군 군인이 지로초를 찾아옵니다.
지로초가 그들을 둘러보며 “이 중에 사내다운 사내는 한 놈도 없구먼.”이라고 하자, 히로세는 “어이어이, 그렇게 말한다면 솜씨 한번 보여 줄 테니 놀라지 마라.”라며 자신의 명치를 50~60번이나 연달아 내리쳤고, 이에 지로초도 “과연, 너는 사내답다.”라며 감탄해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스에히로에는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도 지로초를 만나러 여러 차례 찾아왔습니다.
<사이슈 의원 개설>
1886년(메이지 19년), 지로초는 요코하마에서 도사로 향하는 배 위에서 도쿄대학 의학부 특별과를 졸업한 우에키 시게토시와 알게 되어, 우에키와 같은 도사 스사키 가지마치 출신인 와타나베 료조와 함께 시미즈로 초빙하여 시즈오카현 우도군 시미즈정에 사이슈 의원을 개설합니다.
【최후의 시기】
1887년(메이지 20년, 68세), 오키쓰의 세이켄지에서 간린마루 순난자 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합니다.
비문 ‘食人之食者死人之事’(남의 녹을 먹는 자는 그 사람의 일에 목숨을 바친다)는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쓴 것입니다.
1888년(메이지 21년, 69세), 야마오카 뎃슈가 세상을 떠납니다. 지로초도 장례에 참석합니다.
메이지 23년(1890년, 71세), 해군 소위 오가사와라 나가나리가 군함 아마기를 타고 시미즈항에 들어와 스에히로의 지로초를 찾아갑니다.
1892년(메이지 25년, 73세), 야마다 나가마사 현창비 건립을 위해 슨푸성 안에서 오즈모(프로 스모) 흥행을 엽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부터 시즈오카 사람들은 향토의 영웅 야마다 나가마사의 동상을 세우려 했지만 좀처럼 실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로초도 야마다 나가마사를 존경했기에, 이렇게 스스로 나서서 건립을 추진한 것이었습니다.
오즈모 흥행 외에도 도메의 이와키치를 데리고 도쿄로 올라가, 당시 외무대신이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만나 동상 건립의 취지를 설명하고 기부금을 받았습니다.
1893년(메이지 26년, 74세), 3대 오초의 간호를 받으며 감기가 악화된 지로초는 생을 마감합니다.
협객으로서는 매우 장수한 인생이었습니다.
장례에는 3,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모였으며, 바이인지에서 장례를 치르고 안장되었습니다.
지로초는 초대·2대·3대 오초, 오마사, 고마사, 모리노 이시마쓰 등과 함께 지금도 바이인지에 잠들어 있습니다.